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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30화 - 조용한 전쟁 - 본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6장 동방 원정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30화 - 조용한 전쟁 -

개성공단 2021. 5. 6. 00:23





기록피지에 문장들과 이름이 기록되고 있었다

글씨체는 서로 달랐지만, 그 무게는 변하지 않았다
누구나가 자신의 서명을 써넣고 있었다



아무튼 역사상 공식적으로는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갈라이스 왕국과 볼버트 왕국의 화목 및 협동 선언문 서명이다였다
틀림없이 역사에 남을 일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서 쓰는 실수를 해 버리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은 통상의 일일 것이다

궁궐 내의 웅장한 귀빈실에서 서명식은 거행되고 있었다



먼저 깃털펜을 잡은 사람은 공주 필로스
다음으로 볼버트 왕조의 어린 군주
두 사람의 서명이 끝나면 성녀 마티아와
마도장군 마스티기오스를 비롯한
고위 관리들의 이름도 그 아래에 이어졌다

그 이름을 올린 전원이, 문서의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피에르트가 말했다
맹약이나 선언이라는 것은 이러한 형식이 상례인 것 같았다

뭐 그런거 해봤자, 어기면 다 끝일 거 같은데 말이다




"다음은 당신이에요, 루기스
마지막으로 서명을 해주세요"





옆에 걸터앉아 있던 성녀 마티아가 나에게 깃털 펜을 주며 말했다
상당히 고급스런 깃털을 사용했을 것이다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펜 끝이 단정했다

나는 기록피지를 앞에 두고 무심코 입술을 비틀었다





"나는 됬어, 문건에 이름을 써서 제대로 된 일이 없었거든"





말하는 순간 마티아의 푸른빛 눈동자가
눈앞에서 멈춘 것이 보였다
그녀의 뺨이 재미있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감정이 풍부한 여자인 것 같았다

문건의 내용은 쌍방의 불가침을 다짐하고
마성이라는 위협에 공동작전을 펴기 위한 선언문과 같은 것이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조항이 있었지만,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마티아나 볼버트의 높은 분들이 생각했을 것이다

내용은 괜찮은 것 같은데 서명을 해야 한다는 게 찜찜했다



지난날 영문도 모르고 서명을 했다가
엉뚱한 빚을 진 쓰라린 생각이 되살아나는 것이였다
그리고 나 이 외에 수십명의 입회인도 서명을 했기에 뭔가 불안했다

여기에 서명을 했다가는 또 다른 골칫거리에 휘말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과 함께 깃털 펜을 놓기 위해
손을 벌리려는데 마티아의 손가락이 내 손에 포개졌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부숴버리려는 듯한 힘이 내게 들어왔다





"자... 잠깐, 마티아, 기다려"

"루기스, 당신은 양국의 화목 및 협동의 일등공신이에요
당신이 조정자로서 서명을 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어요"





그건 내가 자는 동안 내 마음대로 결정한 것 같은데
어제는 볼버트 군주 대관의 축하식에서 술만 마셨기에
내가 알게 된 것은 이 서명식이 시작되고 나서였다

그런 억지를 부리는 사이에도
점점 마티아의 손가락이 힘차게 나를 짓눌렀다
역시 스스로 창을 들고 싸움터로 뛰어나갈 만한 여자군




"이것은 당신에게 이상한 의무를 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간의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류끼리 싸울 시간은 없다고 한 사람은 당신이잖아요?"


"……정말 아무것도 없지?"


"물론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나요?"





마티아는 눈동자를 나에게 돌려 다시 한번 깃털 펜을 쥐어주었다

잠시 문답을 주고받은 탓이겠지
주위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해
복수의 시선이 나에게 꽂혀 왔다
갈라이스트, 볼버트 측으로
각각 참석했던 카리아와 피에르트도 포함해서 말이다

뭐, 확실히 지금까지 마티아에게 낚인 적은 없지
사람을 너무 의심하는 것도 나쁜 버릇일 거야




나는 문서 말미에 조정자로 기재된 곳에 이름을 써넣었다

기분이 묘했다
공식적인 뭔가에 관여할 신분은 전혀 아니었을 텐데

다 씀과 동시에 나와 마티아의 손가락이
찰싹 닿으며 묘하게 단단한 소리를 냈다
무의식중에 시선을 그쪽으로 옮겼다

아무래도 반지끼리 부딪친 소리였던 것 같다
내 손가락에 낀 마티아의 성녀 문장 반지와
내가 그녀에게 맡긴 채로 있던 황금 반지

그러고 보니 완전히 갚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마인 드래그만이 지배하는 왕도 잠입 때 교환한 것이였으니까

이 자리에서 돌려놓는게 좋을까?
하지만 내가 말하기 전에
마티아가 우리들에게 모여든 시선을 떨쳐버리듯이 말했다




"반지 교환 건은 다른 기회로 미루죠
지금은 서명식을 하고 있으니까요"





마티아는 유난히 부드러운 미소와
부드러운 눈동자를 보이며 입술을 물결쳤다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레우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눈에 덮여 잿빛으로 잔뜩 흐려진 하늘이 지금 기분엔 딱 좋았다

가볍게 자신의 가슴을 감싸안고
다음에는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싸안아 보았다
느껴지는 것은 체온뿐이었고
일찍이 거기 있던 기색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태어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 혼자였다
분명 괜찮을 법만도 한데
지금은 이것의 누락이 너무나 견디기 어려웠다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무엇보다 빛나는 보석은 이제 어디에도 없으니까 말이다




"뭐야, 갑자기 울고 말이야! 이런 경사스러운 날엔 울지 말라고!"





붉은 머리카락이 창밖을 기웃거렸다
이곳은 2층인데 어떻게 창밖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을까?

목소리의 주인인 샤드는 창문을 통해 멋대로 방에 들어오더니
또한 멋대로 침대에 뛰어올랐다

정말 무엇일까
레우는 갑작스러운 사건의 연속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사스러운 날이라뇨?"


"브릴리간트가 죽었잖아
위협자가 죽었다면 축하해야 할 일 아니야?"





레우는 노골적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보석 아가토스가 없어지고 그 원전을 얻고 나서, 마인이 되고 나서
레우의 표정이나 언동은, 때때로 그녀를 닮은 점을 보이고 있었다




"원수라도 누군가의 죽음을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난 싫어! 기쁜 건 기뻐해야지!"




오늘 처음으로 레우는 어렴풋이나마 경멸의 감정을 품은 것 같았다
세계에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샤드는 일단 사람이 아니였지만 말이다

그렇다기보다 무엇 때문에 왔을까
레우의 명백한 곤혹을 보고 샤드는 침대에서 일어나 말했다




"뭐, 우는 건 네 맘이겠지만
한번 울어버리면,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우는 게 버릇이 될 거야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혀 울지 않게 될 걸? 어지간히 해둬"




그 말을 들은 지 몇 초가 지나서야
레우는 속눈썹을 위로 향했다

이건 어쩌면 그녀 나름의 위안일까
솔직히 위로는 되지 못했지
레우는 왠지 어깨에서 힘이 빠진 것 같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샤드의 구릿빛 눈동자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용건이 있었느냐고 묻자 샤드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레우의 붉은 머리카락이 세차게 튀었다
그것은 그녀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했다.




"네가 원전을 물려받았다면
분명 아가토스가 갖고 있던 보석을 갖고 있을 거 아냐
그 중에서 하나만 돌려받고 싶어"




보석을 돌려달라
그렇게 듣고 나서야 레우는 납득이 갔다
아마도 아가토스가 과거에 보석에 봉했던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가토스의 원전은 살아잇는 생물, 거리 하나조차
보석으로 봉해 영구히 시간을 멈출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아가토스의 진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솔직히, 그녀가 가지고 있던 것을 손에서 놓는 등 레우는 도저히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래 샤드의 소유물이었던 것이 있다면
계속 가지고 있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착잡하게 얽힌 심경을 안고 레우가 입을 다물고 있자
샤드는 기세등등하게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브릴리스가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어
그렇다면 나도 대비 정도는 해두는게 좋지 않겠어?"




그녀의 말과 동시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지금까지 그쳤던 눈이 다시 휘청휘청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폭설나비가 창밖을 사뿐히 날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마치 다시 불길함을 몰고 오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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