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성 연합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37화 - 무구한 칼날 - 본문
유일신 아르티우스, 인류 영웅 아르티아.
그녀는 위대하다
그녀가 있었기에 인류는 마성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녀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인류를 절망의 늪에서 구해낸 영웅이었다
틀림없이 그녀는 인류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 국가를 일궈냈다
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온갖 추악한 것보다 더 추악하군
나는 마검에 손가락을 건 채 양피지를 펼쳤다
갈라이스토 왕국에 소장되어 있던 정밀한 지도
국가가 만들어 낸 만큼
조잡한 지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밀함을 지니고 있었다
대성당으로 가는 길도 쉽게 기록돼 있다
그것도 그냥 가도뿐이 아니다
왕가가 대성당을 만날 때 사용되는 길을 포함한
여러 개의 은신처가 그려져 있었다
대성당 직할지는 본래 갈라이스토 왕국의 영지
어쩌면 대성당 놈들보다도 더 잘 파악할 수 있을지도
혼자 말을 몰면 며칠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것이면 가벼운 옷차림으로 충분하다
나는 달빛을 뺨에 받으며 두 눈썹을 올렸다
느닷없이 등에서 말소리가 났다
"이봐, 웬만하면 대답은 해달라고!"
문을 잠근 방에는 아무도 없다
소리는 창밖에서 났고, 여기는 2층이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마검을 뽑아들며 돌아섰다
그러나 창 밖에는 몸을 거꾸로 뒤집어 있는 샤드의 모습이 보였다
뭐하는 거야 이 녀석...
"밥 시간은 이미 끝났어, 어서 자"
"실례야, 밥을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무... 물론 밥도 원하긴 하지만!"
창문을 열어주자 아무 거리낌없이 샤드는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겨드랑이에는 레우가 있었다
레우의 얼굴은 좀처럼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감정이 풍부했다
물론 마이너스였지만 말이다
찡그린 얼굴이란 이런 걸 말하는 것이겠지
"나는 네게 큰 일을 전하러 온 거야! 대접해줘!"
"...다 먹으면 돌아가"
나는 머리를 감싸쥐면서 초인종을 눌러 시녀를 오게 했다
간단한 야식이면 되겠느냐고 부탁했는데
이상하게 공들인 고기와 샐러드를 빵에 끼운 것을 가져다 주었다
레우는 한 조각만 먹고
샤도는 다섯 개 정도를 먹고 만족스러워했다
나는 레우가 누군가를 경멸하는 표정을 처음 보았다
"……루기스 님, 저희는 밥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랬구나
너무나 호쾌하게 샤드가 빵을 계속 먹으니까
진심으로 그 가능성을 생각해 버렸다
레우의 말에 그제서야 그럴 마음이 생겼는지
샤드는 뺨에 달라붙은 붉은 머리를 떨치며 가슴을 폈다
"그래! 너는 다음에 제브릴리스와 상대할 것이지?
그렇다면 내가 지혜를 하나 주도록 할게!"
"아니, 제브릴리스는 아무래도 좋아"
샤드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야? 정령신은 거인왕과도 천성룡과도 다른 이상적인 존재야
파괴하는 것도 빼앗는 것도 아닌, 축복하고 낳는 신이야
놈이 있는 한 마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야"
담담하게 샤드는 제브렐리스의 이름과 그 몸을 말했다
마치 그 눈동자로 제브렐리스 자체를 보고 온것 같은 말이었다
"샤드, 네가 제브릴리스를 죽일 수 있는 속셈이 있는 건 알겠어
하지만 말했잖아,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샤드와
빵을 문 채 지금 이야기의 흐름을 모르고 있는 듯한 레우
달빛으로 비춰진 방안이 묘하게 밝았다
"나는 대성당으로 아르티아를 죽이러 갈 거야, 목적은 그거 뿐"
지금 이때도 녀석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도저히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순간 마안수 도하스라의 말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아르티아는 정의를 실현하려 한다고 그는 말했다
어쩌면 아르티아는 진정한 구세신일지 모른다
어쩌면 녀석이 말하는 방식이 가장 훌륭하고 희생도 적은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세계의 평온을 어지럽히는 대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아
희생이 적다는 말은 희생된 적이 없는 자의 논리
그렇게 희생당하는 쪽은 이를 악물고 저항할 권리가 있고
희생하는 쪽은 복수를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그 놈은 내 소꿉친구의 몸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전우의 존엄을 짓밟아버리고 말았어
그렇다면 나는 놈을 죽이지 않으면 안 돼
그렇게 하지면 나는 두 번 다시 그들을 대할 수 없을 거야"
소꿉친구 알류에노와 태양 같은 영웅 헤르트 스탠리
곁에 없어도 참 내게 영향을 주는 구나, 하고 나는 감탄했다
마검을 삐걱거릴 정도로 움켜쥔 순간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는 것을 깨달았다
불쑥 하고 고개를 드니
눈앞에서 샤드가 달그락달그락
무릎과 어깨를 들썩이며 떨고 있었다
"으으으.... 아... 아르티아도 부활하고 있구나"
"부활 여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말한 녀석은 있었어
구제와 행복을 좋아하는 것 같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샤드는 스스로 들어온 창문에 발을 걸쳤다
매우 씩씩한 동작이였다
"그렇다면 난 다 끝날 때까지 숨어 있도록 할게!
아무튼 열심히 해! 난 그림자 속에서 응원하고 있을게!"
"기다려요, 부끄러운 줄 좀 아세요"
"죽으면 부끄러울 틈도 없다고!"
날아가려는 샤드를 양손으로 막아선 것은 뜻밖에도 레우였다
샤드는 부축을 받으며 다시 방안으로 돌아왔다
아이에게 이끌려 오열을 터뜨리는 여인은 지독히 이상한 광경이였다
"루기스님……혼자서 가실 건가요?"
"그래, 이것은 내 문제니까
필로스와 마티아에게는 말하지 말아줘"
적진의 한복판에 뛰어들 듯 누구를 끌어들이겠는가
게다가 혼자서는 눈에 띄지 않고 성공 확률도 높을 것이다
레우는 그 붉은 눈으로 나를 본 후에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루기스님은 비겁하시군요."
"맞아! 아르티아가 부활했다면 진작에 말했어야지!
절대로 이곳에 오지 않았을 텐데!"
아닙니다, 레우는 샤드의 귀를 비틀었고
히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그런데 비겁하다니, 무슨 말인가
화를 내는 것도 아니지만 레우는 의미 없는 말을 하는 아이도 아니였다
말이 적은 아이지만 할 말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레우
하지만 이게 제일 나은 방법일거야"
"……전 나라에 대해서도, 싸움에 대해서도 전혀 모릅니다만
만약 루기스 님이 없어지면, 힘든 일이 닥칠거에요"
"글쎄, 여기에 연약한 애들만 있는 것은 아닐텐데"
"아니요, 그런 소리가 아닙니다"
레우는 데굴데굴 굴러갈 것 같은
동그란 눈동자로 머리를 휘청이며 그렇게 말했다
마인화됐기 때문일까
그 말에는 묘한 힘이 깃들어 있었고
그녀의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적어도 아가토스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루기스 님이 없어지면, 다들 버림받았다고 생각할거라고
마성과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될 것이고, 많은 사람이 희생될 거에요"
어린 소녀의 서투른 말.
그런데도 그녀의 말은 이상하리만큼 진정으로 다가왔다
더듬거리는 말투 하나하나가 실제로 그것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아가토스와 레우는 그 사고와 기억을 일부 공유하고 있었다
아가토스의 오랜 경험이 레우의 말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레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루기스 님, 이 모두를 희생하고 버리실 작정이십니까?"
나는 무심코 의자에 앉은 채 말을 잃었다
몇 초의 묵묵부답
침묵이 실내를 지배했다
말을 아무리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눈꺼풀을 꼭 감고 입가를 짓누르고 나서 비로소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레우"
어찌나 한심했던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기분이였다
나는 레우 같은 아이에게 신경을 쓰게 하고
타이르는 일까지 당하고 말았다
원래는 그녀야말로 신경써서 지켜지는 쪽일텐데
레우 말대로
어떤 핑계를 둘러대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아르티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젠 나 혼자 죽는다고 아무 상관 없는 일이 아니였다
나는 마검을 칼자루에 집어넣었다
"미안해, 내가 나빴어
먹고 싶은 게 있어? 뭐든지 말하도록 해"
"그래? 소 한 마리가 먹고 싶어!"
여전히 레우의 배를 움켜쥔 채인
샤드가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그런 샤드를 레우가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이 시선으로 노려보면 나도 괴로울 것 같군
나는 그런 걸 보면서 의자에 다시 주저앉아 실눈을 떴다
레우의 말은 정당하다
지금 상태에서 섣불리 함부로 움직이면 상처가 커질 뿐
이쪽은 아직 약체다
공격해 들어가서 아르티아를
간단하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멍청한 선택일 것이다
약체라면 약체다운 싸움 방법을.
그야말로 일격에 대성당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는 방법을 취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아르티아도 나올 수밖에 없겠지
결국 이것은 나와 아르티아
어느 쪽의 심술이 나쁜가 하는 싸움이 되는 것이였다
나는 그 점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질 생각이 없었다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 > 제17장 성전 시대 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41화 - 둘 간의 모의 - (0) | 2021.05.07 |
---|---|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40화 - 가르침 받은 자들 - (0) | 2021.05.07 |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39화 - 뜨거운 용 - (0) | 2021.05.07 |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38화 - 적은 북방에 있다 - (0) | 2021.05.07 |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36화 -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 (1) | 2021.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