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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181화 - 인도하는 성녀 - 본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7장 베르페인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181화 - 인도하는 성녀 -

개성공단 2020. 4. 11. 10:50

성녀 마티아의 머리카락이 땀과 함께 그 뺨에 달라붙었다

어깨로 숨을 쉬면서 몇 모금 정도의 물을 입에 적셧다

 

그 청량한 감각에 마른 입과 목이 저리는 것 같았다

 

호흡을 안정시키면서, 피투성이가 된 손 끝을 비비었지만,

좀 처럼 더러움은 없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몇 번이고 피를 뒤집어 쓰는 동안, 달라 붙은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마티아는 손가락을 마주 대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곳에서든 사용할 수 있는 물도 한정되어 있다

단지 손을 씻는다는 이유로 쓸데없이 소비할 수도 없다.

갈루아마리아로 돌아간다면 손을 씻을 뿐만 아니라, 목욕까지 해버리자

오랜만에 머리도 빗으면 정말 시원할 것이다

 

가슴에 띄운 기대에 반응해서 마티아의 귀가 민감하게 흔들렸다

귓전에 조용하게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의식을 차렸다면 입을 축일 정도의 물을 주세요

그리고 붕대를 감을 때, 약초를 바르는 것고 잊지 마시고요"

 

침대에 누워 무거운 눈꺼풀을 감고 있는 베스타리누를 바라보며 말했다

옆의 문장교도가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병을 침대 옆에 놓았다

 

마티아는 그 모습을 시야에 넣으면서, 다리를 움직이며

부상자가 서로 겹치는 치료장을 일시적으로 빠져나갓다.

과연 몸을 완전히 떨어뜨릴 수는 없지만, 

조금 호흡을 가다듬는 정도의 휴식은 인정될 것이다

 

차가운 공기가 마티아의 뺨을 찔렀다

후우, 하고 폐에 고인 한숨이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이것만으로도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였다

 

강철 공주 베스타리누, 그녀가 오래 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용태가 완전히 가라앉았다면,

의술을 배운 사람에게로 옮겨야 할 것이다.

 

마티아의 눈썹이 조금 이완되어 갔다

루기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던 것인가

나도 조금은 성녀 티를 낼 수 있었던 거 같아

 

사람의 생사 등,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해서 눈에 강하게 새겼을 텐데

그리고 그것들을 타산적으로 나누어 냈을 텐데,

새삼스럽게 단 하나의 목숨만을 구하다니, 나 답지 않아

 

어쨌든, 이제 베스타리누에 관해서는 

더 이상 상처가 심해지지 않길 바랄 뿐이였다

상처에서 몸을 파고드는 병이 생겼다면, 더는 도와줄 수 없다

 

마티아의 입술에서 다시 무거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번엔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따윈 없었다

 

역시 성녀란 이 정도 였군요

 

오랜만에 생명의 등불을 건드린 탓일까

이상하게 마음이 감상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마티아는 이제 자기를 비웃지 조차 못한 채, 민가의 외벽에 기대었다

 

어린 시절에는 더 많이 알면 알 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그렇게 믿었다

 

물론 자라면서 많은 것을 알 정도로, 그런 말은 거짓임을 깨달았고,

이 세상엔 이상과 같은 것이 실제하지 않는 것도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성녀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환상은

어째서인지 좀처럼 자신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꽤 꿈을 꾸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인간은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난다고 믿었다

그것이 어떻게 잘못되어 불행하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모든 것을 깨우치고 성녀로서 훌륭해진다면

반드시 모든 것을 이 손으로 안을 수 있다고 맹신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 시절에는 정의로움을 승리시키는 마법이 있고,

사람을 살리는 기적이 있으며, 세상은 놀라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다

 

분명 어린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얼굴을 찡그린 채, 눈동자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런 인간은 성녀가 아니야'

 

입술이 살랑 흔들렸다. 

그래, 지금의 나 따위는 이상의 성녀와는 거리가 멀다

여하튼, 눈 앞의 목숨 하나 구하는데, 행운을 빌어야 한다니

 

성녀라면 생명의 한 두가지 쯤 쉽게 건지지 않으면 안되는데 말야

그러나 언제부터 일까, 문장교도의 지도자가 되었을 쯤엔

나는 목숨을 건지기 보다는, 선별해서 버리는 쪽이 되어버렸다

 

한심하다, 이젠 분명 알건 다 아는 나이가 됐는데

새삼스레 이런 일로 고민하려고 하다니

루기스에게 물어본다면 그는 무슨 내게 무슨 말을 할까

너 답지 않다던가, 너에게 고민이라는게 있다니 의외라던가,

그런 쓸데 없는 할거 같군

 

아아, 정말이지. 당신만 없었다면 이런 식으로 고민하지 않았을텐데

 

자, 하고 차가운 공기를 다시 폐 안으로 들이키면서

마티아는 눈동자를 가늘게 만들었다.

휴식도 이 정도만 하면 충분하다

피폐한 가운데서도 몸을 움직이는 것은

일찍이 지하에 잠적했을 때의 경험으로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이제 루기스도 이곳으로 옮겨질 것이다

여하튼, 스스로 가시밭 속에 몸을 뛰어들어 놓고는, 상처가 없을리가 없다

그 육체와 정신이 온전히 상처 입은 채, 일을 끝낼 수 있을 만큼

루기스가 택하는 길은 항상 순탄하지가 않다

그는 그런 인간이며, 그러한 생활방식 밖에 택할 수 없는 성질인 것이다

 

그래서 루기스에게 나라는 존재를 깊이 새겨줘야 한다.

다시 입을 상처는 분명 좋은 기회야

아무튼 그섯은 나와의 약속을 어긴 증거니깐

 

실컷 곤란하게 만들어 줘야지

워낙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으니, 봐주는 건 절대 없을테야

 

마티아는 나중에 일어날 기쁨을 상상하니

피로는 육체에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자신도 모르게 뺨을 치켜세우고 말았다

 

다소 루기스에겐 끔찍한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당연하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그를 보다 올바른 길으로 인도하기 위한 일이니까

 

그것은 자신이 완수해야 할 책무다

루기스가 상처를 입으면, 그 위에서 내 말로 새로운 상처를 새기리라

내 말이라는 우리 안에서 살며, 결코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을 기억하도록

 

그렇지 않으면 루기스라는 인간은 순식간에

스스로 위험한 길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마치 걸어다니는 불씨 같은 것이다.

 

루기스, 당신이 이상을 추구한다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때까지의 여정은 제가 관리하겠어요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에서도

마티아의 뺨 만큼은 자연히 열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7장 베르페인 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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