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8장 악덕 왕국 편 (31)
8성 연합
공중정원 가자리아에 소속된 엘프의 기록관 라이쇼는 필사적으로 눈앞에서 오가는 대화를 기록피지에 적고 있었다 아까부터 이마에 차가운 땀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것을 닦을 틈조차 없었다 문장교의 인간과 가자리아의 고위 관료들이 숨쉴 사이조차 없다고 할 정도로 말을 잇고 잇었가 회의가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에는 라이쇼의 손 끝에 감각은 없어졌을 정도였다 회의록을 찍는 일은 수수하기 짝이 없지만 세력과 세력의 회의에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였다 말한 모든 것이 나중의 거래의 재료가 될 수 있었기에 대화의 모든 것을 기록피지에 써둘 필요가 있었다 기록피지란, 글자 그대로 담아낸 내뇽을 일체의 막힘 없이 역사로 기록하기 위한 것이였다 설령 큰 불이나, 거친 파도에 휩쓸릴지라도 그 기록은 없어지지 않고, 후세에 전할 수 있다..
문장교와 가자리아의 합동회의 진행은 매우 순조로웠다 라르그도 안은 다소 표정과 태도를 굳게하면서도 평소대로 능숙하게 진행을 해왔고 무엇보다 문장교의 대표자인 성녀 마티아, 가자리아의 여왕인 핀 엘디스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 회의 진행을 원활하게 하고 있었다 이것이 만약 사신끼리 주고받는 것이라면 하나의 절충안을 만드는 데에도, 며칠, 몇주가 걸릴 것이다 서로 어느 곳을 양보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주군에게 주어진 권환인지 그것 등을 일일히 확인하면서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였다 그 확인을 위해 말을 이용해 곳곳을 달리게 하거나 주군에 대해 격식을 차린 문서를 작성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나 같은 인간은 너무나 귀찮아서 그냥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여하튼 나 같은 빈민가나 용병같은 사람에겐 작전회의라 한..
갈루아마리아의 대성문을 앞에두고 나는 졸음을 쫒기 위해 눈을 가볍게 비볐다 데...데엥...하는 큰 종소리가 나의 머리에 갑자기 울러 펴졌다 숙취와 같은 독특하고도 둔탁한 통증이 나의 몸으로 기어가며 등줄기를 쳐냈다 "...따로 일부러 나를 부를 필요는 없었잖아? 사람마다, 각각 위치라고 하는 것이 있으니까 말야" 나의 그런말에 매우 못마땅한 목소리가 귀를 비틀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너는 도대체 어디서 나를 맞아들이겠다는 거야? 주군이 발걸음을 옮긴다면 마땅히 기사가 제일 먼저 맞는게 이치 아냐?" 나의 눈 앞에서 싫은 듯한 말투를 하는 여성, 엘디스는 말투와 다르게 표정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찍히 갈루아마리아에서 모습을 보였던, 환영과는 다르게 실제 그녀가 지금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엘..
라르그도 안은 자신의 내장이 비틀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몸은 마디마디가 굳었고, 앞으로 나아가는 다리는 상당히 무거웠다 방심하면 작은 입술에서는 얼마든지 한숨을 내쉴 것 같았다 그것도 당연한 일로, 여하튼 안은 회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 문장교와 가자리아의 합동회의 이전의 문장교도와 가자리아가 동맹을 맺었다는 의례적으로 한 행사 같은 회의와 다른 이번에는 자신들에게 내려오는 대성교라는 검을 앞에 두고 문장교도와 가자리아가 서로의 어금니를 드러내는 시간이였다 그렇다면 이제 그 준비 때문에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랄 수 밖에 없었다 안은 합동회의에 참석하는 이상, 몸가짐 정도의 화장은 했지만 그녀의 눈 밑에는 더 깊은 구석이 형셩되어 있었다 회의 출석자의 결정, 정밀한 작전의 책정에 날마다 변동하..
정식으로 문장교에 관여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애매한 입장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엘디스, 엘프를 섬기는 기사로 살 것인가 그것이 라르그도 안에게 전달된 선택이였다 그녀치고든 드물게 떨리는 목소리 였다 가능하다면 성녀에게 바람직한 선택을 해 주기를 요청하곤 안은 이쪽을 노려보며, 방을 나가버렸다 결국 근신은 풀리지 않았다는 건가? 나는 다시 찬 공기가 가득 찬 방에 그대로 놓여진 채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며, 저절로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정말 난처하군, 나에겐 어려운 선택이야, 오히려 곤혹스럽기까지 하군 어쨌든 내가 지금까지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는 그저 손을 뻗어, 손가락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억지로 무엇인가 선택한다고 하는 행위였다 그것이 지금은, 자 선택하라는 듯이 선택사항이 주어져 있었다. 그것은 ..
"루기스님, 당신은 회의에 참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르그도 안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나는 가볍게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그 말을 들었다 동시에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머리속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건 네까짓 것이 회의에 나와 봤자, 아무런 소득이 없을 테니 이대로 근신을 계속하라는 무슨 신랄할 말씀인건가? 아니, 확실히 내게 일부러 들린 곳에서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하지만 안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원래 그녀는 협조를 제일로 해서, 자리를 어질럽히지 않는 일에 주력하는, 말하자면 조정역 같은 존재였다. 나는 입술을 천천히 열면서, 말을 더듬으며 목을 열었다 "도대체 뭣 때문에 그래? 따로 회의에 나가봤자, 별 의미가 없단 말이야?" 가만..
갈루아마리아의 보루는 돌에 쌓여 있는 탓에 매우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그냥 방안에서 가만히 있을 뿐인데도, 냉기는 내 몸을 찔렀고, 폐 속에 차가운 공기를 넣고 있었다 안되겠군, 이젠 정말로 한계야 이런 방에 계속 틀여박혀 있는 것도 무리가 있어 적어도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한 에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테이블 위에 놓인 도자기들은 아무리 뒤집어도 한 방울의 물기 조차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거야 처음, 그 묘한 제안을 한 것은 성녀 마티아의 오른팔인 라르그도 안 이였다 "용사님, 잠시 방 안에 있어 주겠습니까" 라르그도안 가라사대, 그것은 문장교라는 조직의 규율 때문이라 했다 용병도시 베르페인을 함락시킬 때, 내가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고, 갈루아마리..
로이 메츠 폴의 저택, 그 뒷문으로 천천히 마치 그림자가 기어 나오듯이 리처드가 모습을 보였다 별로 앞문으로 당당하게 나갔다고 해서 저택의 주인인 로이 메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지만 그는 뒷문으로 몸을 나섰다 고위 귀족이 가진 저택의 정문이라는 화려한 장소는 리처드에겐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무엇인가 나쁜 것이라도 입에 머금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에 오히려, 리처드는 뒷골목 같은 어둑어둑한 장소가 입맛에 맞았다 인간이란 숨 쉴 수 있는 장소가 원래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리처드는 생각했다. 물고기가 하늘로 날아가서 움직이거나 거꾸로 새가 바다로 가라앉는 일이 없듯이 말이다. 인간에게도 살아가야 할 장소, 아니 살아갈 수 있는 장소란 것이 정해져있다 그걸 결정하는 것이 신..
- 악랄한 자 '악덕의 주인 루기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어라' 원탁 위에 펼쳐진 양피지를 바라보며, 리처드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들여다보았다 얼굴에 새겨진 주름과 상처가 일그러지면서 그림자가 깊어졌다 그리고 나이 값에 걸맞은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훌륭해졌군, 그 마른 아귀녀석..." 감탄한 듯 턱수염이 물결쳤다 그의 뺨은 무너지며, 얼굴엔 확실한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훌륭해졌다. 그 말은 틀림없는 진심어린 칭찬이였다 하찮은 인간이 남에게 시비걸기 위한 그런 표현이 아닌, 경험을 많이 쌓은 리처드에겐 경의의 표시로 순순히 흘러나온 그런 목소리였다 정말 감탄할 지경이군, 그 무엇도 아니였던 꼬마가 지금 이렇게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니 말이야 나라는 존재를 역사에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소 아쉬움..
갈루아마리아 보루 안에 존재하는 훈련장에는 활쏘기 표적으로 만들어진 대충 모아 놓은 건초가 여러 다발로 묶여 있었고 병사에 발에 짓눌려 반짝 말라버린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낮이 조금 넘은 이 자리엔 누구 하나 접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을 드나드는 병사들은 기꺼이 훈련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밥을 찾아서 휘청거리며 돌아다니는 법 이였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곳은, 천천히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말을 주고 받기에는, 딱 좋은 장소였다 "고용주... 동료라는게 저 은발 맞지?" 그 소리를 내뱉은 입술은 참으로 복잡하게 모양을 일그러뜨리며 손가락을 감싼 채, 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브루더의 모습에,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한 순간 공백을 두면서도, 나는 긍정을..